인간의 불행과 행복의 차이는,
잘못된 생각과 기준의 뿌리에서 출발한다.
이러므로 실제로 행복하려면,
우리의 잘못된 생각과 오염된 세상적인 기준들을
성경적인 기준과 관점으로 전환시켜야만 한다.
세상에서도 생각이 변해야 운명이 달라진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사무엘 스미스는 말하기를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성품이 바뀌고 성품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고 했다.
큰 배를 움직이는 것은, 선장이 붙잡고 있는 키이듯이,
우리의 삶도, 생각에 의해서 움직이게 된다.
이러므로 잘못된 생각과 오염된 기준은, 우리의 인생을 어렵고 힘들게 할뿐이다.
예를들어,
장수하면 행복한 것이고, 일찍 죽으면 불행한 것이며
부자되면 행복한 것이고, 가난하면 불행한 것이며
건강하면 행복한 것이고, 병들면 불행한 것이다는 생각과 기준은
성경적인 기준이나 관점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잘못된 기준이며, 세속적인 잣대이다.
그러나 우리는, 날때부터 성경적인 아닌 세상식을 학습하고 의식화함으로
세상의 잣대를 걸러냄이 없이 삶에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건강하기만 하면 행복할까?
성공하면 행복할까?
장수하면 행복할까?
부자되면 행복할까? 그럴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수도 있다는 것이 성격적인 관점이다.
나는 권사님들이나 여전도사님들 하고 심방을 할때
종종 이런 경험을 할때가 있었다.
우리 일행은, 어느 가정을 심방하기 위하여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다.
그리고 심방대원들은 거실에 앉아 도착기도를 하게 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대충 기도를 마친 심방대원들끼리 이런 말들을 주고 받는다.
'아~ 집사님.복 받으셨네요'.
'tv를 벽걸이로 바꾸셨네요'
'냉방고를 지펠로 바꾸셨네요'
오호통재라!
성경 어디에, '지펠로 냉장고를 바꾸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아이스 박스를 냉장고로 사용하는 성도는 저주를 받은 것인가?
잘못된 기준에 춤을 추는 것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생각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음으로
행복속에서도 불행의 늪을 헤매며,
충분한 은혜 속에서도 기갈과, 그늘진 삶을 면치 못하고 산다.
이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도, 믿음이 없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부자를 보거나, 형통한 악인을 보면 부러워 하고
믿음이 좋지만, 가난하거나 고난중에 있거나 실패한 사람을 향하여
불행하다고 단정짖고 산다.
다시말하면 형통-행복, 고난-불행이라는, 고질적인 생각이 안 바뀌면
절대로, 불행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를 건물로 생각하는,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는 절대로 좋은 교회 생활이 불가능하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성령받아 생각이 바뀐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작든 큰 교회든, '성령공동체'를 이루는 교회는, 좋은 교회이다.
은혜란, 가치관과 생각이 바뀌는 것이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무슨 소리를 듣고, 환상이 열리고..
그것은 은사이지, 은혜가 아니다.
은혜는, 고질적인 가치관과 잘못된 기준들이 변화는 것이다.
아무리 예수를 오래 믿고, 큰 은혜(?)를 받았어도
기준이나 가치관이 세상적이면, 그 은혜는 가짜이다.
진짜 은혜는, 껍데기만 변화시키지 않는다.
알맹이도 변화시킨다.
어떻게, 예수를 제대로 믿는다면, 그렇게 tv에 심취할수 있는가?
그것이 가능하다면
좋은 자동차가 있는데도, 낡은 자전거에 집착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아직도 낡은 자전거에 집착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자동차가 아직 없거나
자동차가 있더라도, 운행할수 없는 고장난 자동차일 것이다.
이와같이 우리가 성경적인 가치관이나, 기준으로의 전환없이 예수를 믿는다면
평생 우리의 영성과 행복에, 요동이 일어 나게 될것이다.
중요한 것은,
가난하든 부자이든, 성공했든 실패했든
큰 교회이든 개척교회이든, 건강하든 병들었든 상관없이
나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이라면, 가난하면 어떻고 병들었으면 어떠랴.
세상적인 기준이 맞다면, 헬렌켈러라든지.. 송명희 자매라든지.. 조엘이라든지..
이런 사람들은 저주 받은 사람들이며,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의 조건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모든 조건과 상황을 초월하여 하나님이 하실 일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실패했는데, 매일 싱글벙글 하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의 실패를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반대로 성공했는데, 매일 같이 불평충만하다면
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은 가리우는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가 집중해야 할일은
생각과 기준을 세속적인 관점에서, 성경적인 관점으로 바꾸어 가는 일이다.
이것이 안되면
우리는 은혜 받을수록,, 오래 믿을수록,, 더 큰 수렁에서 헤매게 될것이다.
하나님은, 건강한 사람을 통하여서도 영광을 받으시지만
날때 부터 소경된 사람을 통하여서도, 하실 일이 있다고 말씀 하신다.
하나님은, 큰 교회들을 통하여서도 영광을 얻으시겠지만
이름없는 작은 시골교회를 통하여서도, 하실 일들이 있다고 말씀 하신다.
이러므로, 하나님은 제대로 만난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이런 고백을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그러나 하나님을 어설프게 만난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에 대하여 섭섭함이 충만하다'는 것이다.
이 복음의 비밀이, 깨달아 지고 믿어져야
우리는 허리가 꺽이는 고난과 역경속에서도, 하나님이 하실 일들과
나를 통하여 나타내실 일들이 있다는, 감동과 주체할수 없는 희열을 품게 된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존귀한 자요' '하나님의 둘도 없는 특별한 자녀'임이 느껴지게 된다.
그리고 행복의 뿌리는, 보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듯한 생각과, 성격적인 기준과 가치관에서 비롯된다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제 40대 주부가
우등생인 딸이 대학에 실패한 것을 비관하여, 스스로 분신하여 목숨을 끊었다.
그 여성의 가치관과 잘못된 생각의 결과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최악의 상황과 조건이라할지라도
긍정적인 생각과 성경적인 가치관으로 무장한다면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넉넉히 살수있으며
뿐만아니라, 깊은 수렁에서도 충분히 찬송할수 있다.
이렇듯이 생각과 가치 기준에 따라, 우리는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며
불행하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나 환경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런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기준과 세속적인 가치관때문에, 힘들어 하고 어려운 것이다.
바울을 보라!
감옥에서도 실라와 함께, 이중창으로 찬송의 하모니를 이루지 않았는가?
문제는, 감옥이냐 궁궐이냐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생각의 방향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할것은
'주여!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옵소서'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