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의 향기
함께 자라가며
◈ 라헬 ◈
2005. 7. 3. 04:06

딸아이의 교실청소를 돕고 나오다가,
복도에서 담임선생님과 마주치게 되었다.
한 학기가 다 지나도록 담임선생님과는
그저 눈인사나 나누는 게 다였는데,
이번엔 선생님께서 먼저 몇마디 말을 거셨다.
영솔이가 그림이나 시 등 감수성과 창의력이 뛰어나다며
재능을 잘 살려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물어오셨다.
"어머니, 집에서 오빠 이상은 아니래도
오빠에게 하는 만큼은 영솔이에게도 신경을 써 주시지요?"
그리고 얼마전 교과 문제 중에
자신이 자라는 데 도움을 준 사람 세 명을 쓰라는 게 있었는데,
그 때 영솔이의 답 중에 '엄마'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쉬는 시간에 따로 불러 엄마는 왜 안썼느냐 물었더니,
"우리 엄마는 나한테 도움 준 것 없는데요."라고 대답했단다.
평소에 쉬는 시간마다 조잘거리는 아이들의 수다를
한마디도 흘리지 않고 꼼꼼히 들어주며,
매일 검사하는 일기장에도 꼭 한마디씩 의견을 달아주시는
교육자다운 애정이 깊은 선생님인 걸 알기에,
내게 건네주시는 그 이야기들이 무척이나 고마왔다.
그래서, 영빈이에게 대하듯 눈높이를 좀 더 낮추고
영솔이에게도 다시 아기처럼 다독이며 상처난 마음 달랠테니,
선생님께서도 계속 눈여겨봐달라고 부탁드리고 교실을 나왔다.
아이의 눈은 정확하다.
그냥 우스개 소리로 다른 이들에게
"영솔이는 너무 수월해서 어떻게 키웠는지 생각이 안나요.
그냥 낳아놓으니까 저절로 다 큰 것 같아요."
라고 말하곤 했었지만, 그런 무심한 가운데
영솔이는 가슴 속 한구석 허전하고 외로운 빈공간을
꼭꼭 숨겨놓고 잊으려 아프게 애썼었는지도 모른다.
먹을 것도 장난감도 모두 다 오빠에게 양보하고,
무심하고 성급한 엄마와 아빠의 실수까지 다 이해하며,
식사 전 기도 시간에도 자신의 요구는 하나도 없이
가족들 이름만 하나하나 대며 소원을 빌던 아이.
길에서 다른 아이의 부메랑을 뺏으려던 오빠의 모습을 잊지않고,
며칠간 용돈을 모아 그것과 똑같은 부메랑을 사주던 아이.
'말아톤' 상영실에서 곁의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려고
앞좌석 등받이에 얼굴을 몰래 파묻고 눈물을 닦던 아이...
키는 자랐지만 생각이 더딘 영빈이를 대하듯
키와 정신은 자랐지만, 생기가 약한 영솔이가 되지 않도록
나는 또 다시 사랑을 선택하고 사랑으로 자라야겠다.
엄마라는 자리는,
해야만 한다는 의무나 인내, 눈물겨운 희생으로는 부족하다.
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기쁨에 겨운 선택이어야만 충분하리라.



♧ 그림은 김길상 화백의 작품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