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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화하택(上火下澤) 과 100년전 우리 조상 어떻게 살았나?

◈ 라헬 ◈ 2005. 12. 28. 03:19

 
      ‘상화하택(上火下澤)’. 대학교수들이 올 한해를 돌아보며 꼽은 한자성어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물과 불, 내편 네편으로 나뉘어 극단적인 대립을 해왔다고 한다. 지난해 선정됐던 사자성어 역시 패거리를 지어 상대방을 공격한다는 의미의 ‘당동벌이(黨同伐異)’였다. 우리 사회의 진정한 모습은 과연 이처럼 사분오열 상일까. 이 같은 모습이 한국인의 한국인다움일까? 우리 사회는 예로부터 ‘함께’라는 공동체 의식이 유난히 강한 민족이었다. 이를 바로 보여주는 것이 ‘우리’라는 표현이다. ‘우리나라’와 ‘우리 집’, ‘우리 민족’ 등의 표현은 여타 민족,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미국은 대부분 ‘나의(My)’라 한다. 중국은 ‘우리’라는 한자가 아예 없다. ‘상부상조’역시 우리네 민족의 오랜 전통 가운데 하나였다. 물론 사회가 급변하고 생활양식과 시대상황은 항상 바뀌어 왔다. 그러나 우리 사회, 우리 민족에게 지워지지 않는 문신과 같은 특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상부상조의 전통이 돌연 ‘드잡이질’로 변할 수는 없다. 미술사학자 이돈수 씨가 소장해온 옛 사진자료 등을 통해 한국성(Koreanity)을 되돌아 본다.

*※* 1900년대 초 이미지로 보는 코리아니티(koreanity, 한국성) *※*

좌절하지 않는 민족 - 타향...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들의 모습. 
조국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은 
해맑은 어린이들이 모습이 인상적이다.

근면성실한 민족 - 아이들도..
어린 아이들도 어릴 때부터 집안 일을 돕는 것이 관례였다.

더불어 사는 사회 - 가을 품앗이
가을 수확기에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벼를 수확하고 있다. 
이 때 쯤이면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빠지지 않고 일을 도왔다.

더불어 사는 사회 - '함께' 도리깨질
추수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은 역시 함께 모여 도리깨질을 하곤 했다.

더불어 사는 사회 - '복' 사세요~
복(福)조리를 사고 파는 모습. 
복조리는 섣달 그믐날 한밤 중부터 
정월 초하룻날 아침 사이에 사서 걸어놓는 조리. 
조리장수는 초하루 전날 밤부터 복조리를 사라고 외치며 돌아다녔다. 
각 가정에서는 밤에 자다 말고 일어나서 
1년 동안 쓸 수 있는 양의 복조리를 사는데, 
밤에 미처 사지 못한 사람은 이른 아침에 샀다. 
복조리는 일찍 살수록 좋다고 믿었다. 
조리는 쌀을 이는 도구이므로 
그 해의 행복을 조리와 같이 일어 얻는다는 뜻에서 
이 풍속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근면성실한 민족 - 저 많은 생선을.. 
수많은 생선을 차곡차곡 쌓아 말리고 있다.

근면성실한 민족 - 초가지붕 만들기
짚을 이용해 초가집 지붕을 만드는 일도 
쉴 새 없이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좌절하지 않는 민족 - 경성 거리 누비는 일본군
경성 거리를 행군하고 있는 일본 군인들. 
한국을 전쟁터로 삼았던 러일전쟁 당시의 일본군들이다.

좌절하지 않는 민족 - 물자 수탈
조선의 물자를 일본으로 실어가기 위해 배가 정박해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생산된 쌀의 약 20~30%가 일본으로 반출됐다. 
이에 조선인들은 쌀이 모자라 보리쌀과 만주에서 들어온 
조와 수수 등 잡곡을 혼식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게다가 1937년에는 일본이 지나사변을 일으킨 것이 
세계 2차 대전으로 확대되어가자 일본정부는 전시동원령을 내려 
군량미를 싼 값으로 확보하기 시작했다. 
이 때에도 우리 농민들은 공출미라는 이름으로 
일본 정부에 쌀을 헐값으로 바쳐야만 했다. 
공출제도에 시달렸던 우리 농민들은 일제로부터 해방은 
곧 공출제도의 폐지라고 여길 정도였다.

좌절하지 않는 민족 - 고종황제 장례식
근대 비운의 역사 한 가운데 있었던 고종황제의 장례식. 
그는 일제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합방하자 
이태왕(李太王)으로 불리다가 1919년 정월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당시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했다는 풍문이 유포되기도 했다. 
이는 민족의 의분을 자아냈고 인산례(因山禮)로 국장이 거행될 때 
전국 각지에서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났다.

효의 나라 - 시묘살이
부모님 묘소 앞의 움막. 
부모님 상(부친상,모친상)을 당하면 묘 앞이나 근처에 
이처럼 간단한 움막을 만들어 묘를 지키며 
돌아가신 부모님을 기리고 명복을 비는 시묘살이를 했다.

효의 나라 - 곡
돌아가신 부모님 묘소 앞에서 곡을 하는 모습. 
곡은 상(喪)을 치를 때 소리내어 우는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곡이 의식화한 것은 
'주자가례'가 전례된 이후의 일로 추정된다.

효의 나라 - 회갑잔치
회갑연. 회갑은 61세(만60세) 되는 생일로 
육갑년도(六甲年度)에서 태어난 지 60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온 간지년(干支年)의 생일을 뜻한다. 
환갑이라고도 한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60세를 넘기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에 환갑을 맞이하는 일은 경사 중의 경사로 
그 자손이나 제자들이 잔치를 마련하고 축하하는 관습이 생겼다. 
      이돈수 씨가 말하는 코리아니티. ▲ 더불어 사는 사회 ‘우리’라는 표현은 우리 민족의 독특한 의식체계를 잘 보여준다. 이는 정(情)과 한(恨)이라는 민족의 핵심 정서에서 기인한다. 정(情)은 ‘사랑’과 다른 개념이다. 오랫동안 친밀한 접촉이 전제조건이다. 이 때문에 정은 두텁게 쌓이고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한(恨)은 부당하거나 회피할 수 없는 상황이 지속할 때 보통 발생한다. 이처럼 오랜 시간을 거쳐 형성된 정과 한은‘더불어’‘함께’하는 공동체 의식 속에서만 해소될 수 있었다.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우리만의 문화를 꽃피우게 하는 근원이 됐던 것이다. ▲ 근면·성실한 민족 ‘부지런한 유대인들을 하루아침에 뛰어넘을 정도로 엄청난 생활양식을 가진 나라’ 우리 민족을 두고 전 세계가 내린 평가다. 일제 강점기와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으면서도 순식간에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것에 대한 경외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의 원동력은 우리 민족의 근면·성실에 있다. 우리 민족은 이제 근면·성실을 무기로 디지털시대라는 새로운 도전 앞에 서 있다. ▲ 좌절하지 않는 민족 우리 민족의 생활터전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이는 등 지정학적 조건으로 인해 외세의 침략과 탐욕의 대상이 돼 왔다. 병자호란과 임진왜란, 일제 강점기 등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좌절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항상 이를 극복해 왔다. ▲ 효(孝)의 나라 효는 전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는 우리의 아름다운 문화유산이다. 우리의 효 문화는 중국 유교의 그것과 다르다. 중국의 효는 생활의식 개념이다. 반면 우리의 효는 홍익인간, 정(情), 한(恨), 신명(神命)이라는 민족 고유의 정서에 배여 있는 ‘우리’라는 공동체 개념이 가족주의를 낳았고 이는 충효예를 중시하는 유교이념과 만나 우리만의 독특한 효 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코리아티니란? 코리아니티는 korean의 명사형으로서 koreanity와 Korean + (ident)ity 또는 Korean + (commun)ity의 의미의 합성어로서 완성된 개념이 아니다. 사전에도 없는 단어다. 다만 ‘한국 사람의 것’ 또는 ‘한국적인 것’에 대한 고찰과 모색을 말함이다. 이는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과 관련한 옛 이미지와 지도를 수집해 오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것이기도 하다. 코리아니티는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우리 속에서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한류도 어떤 면에서 하나의 코리아니티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현악기 연주자가 많은 것을 비춰볼 때 우리 피 속에 흐르는 현악기에 대한 타고난 감각 또한 코리아니티다. 김치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코리아니티다. 김치의 예를 들어보자. 김치가 김치답기 위해서는 김치를 적절하게 발효시키는 미생물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나 미생물은 눈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이처럼 세세하게 짚어내기는 힘들지만 마치 미생물처럼 미세하면서도 주요한 것 바로 한국의 것에 대한 수집과 축적이 코리아니티라고 생각한다. 미디어다음 / 김준진 기자 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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